서울서부지방법원 2016. 11. 3. 선고 2016노287 판결 [출판물에의한명예훼손]
재판경과
ㅇ 서울서부지방법원 2016. 2. 5. 선고 2015고단1605 판결
ㅇ 서울서부지방법원 2016. 11. 3. 선고 2016노287 판결
ㅇ 대법원 2017. 5. 11. 선고 2016도19255 판결
피 고 인 피고인
항 소 인 쌍방
검 사 임무영(기소), 정재현(공판)
변 호 인 법무법인 바른 외 1인
원심판결 서울서부지방법원 2016. 2. 5. 선고 2015고단1605 판결
주 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이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이 유
1. 항소이유의 요지
가. 피고인의 사실오인 또는 법리오해 주장
피고인이 자신의 책에서 제기한 주장은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 의견의 표명일 뿐이고, 피고인에게는 허위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비방의 목적도 없었다. 게다가 원심은 변론종결 이후에 검사가 제출한 참고자료를 적법한 절차 없이 증거로 채택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따라서 원심판결에는 사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
나. 쌍방의 양형부당 주장
원심의 형량은 부당하다.
2.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은 역사학자로서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다. 피고인은 2014. 9. 4.경 “△△ △△ △△△△”이라는 책(이하 ‘이 사건 책’이라 한다)을 집필하여 발간하였다. 위 책에는 공소외 1이 쓴 “○○○○○○○ ○○○○”라는 저서(이하 ‘공소외 1의 책’이라 한다)를 다룬 내용이 있었다.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최초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일본인 공소외 2(이하 이 사건 책 및 공소외 1의 책에 나오는 표기에 불구하고 통일하여 ‘공소외 2’라 한다)의 설의 핵심이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데 있지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존재나 성격에 있지 않다는 점을 밝히고, 한국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신빙성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면서도 『일본서기』의 기술 중 한국에 유리한 자료들은 신빙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타 사료와의 비교 및 교차검증을 통해 『일본서기』의 기술 중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는 부분, 모순점, 허구가 명확한 부분을 정리하고,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설을 채택하게 된 경위를 추정한 다음, 『일본서기』의 기술을 믿는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할 수 없고, 기원 369년부터 6세기 초반까지 한반도의 가야 지역은 백제가 목씨 일족을 통해 경영한 것이지 일본이 점령하여 통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백제와 일본 야마토 정권(이하 이 사건 책 등의 표기에 불구하고 통일하여 ‘야마토 정권’이라 한다)과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는 백제의 왕자나 공주가 왜의 천황가와 혼인을 맺고, 고위 관료층 간에 인적 교류가 있었으며, 백제의 왕자가 현 천황가의 시조가 되는 등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실리적으로는 백제가 선진문물을 전수하면서 그 대가로 왜인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즉, 공소외 1의 견해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을 부정함은 물론, 일본이 고대사의 특정 시기에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정 지역을 점령하거나 통치했다는 사실을 일본인이 신봉하는 『일본서기』의 사료를 이용해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이 사건 책에서,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에서 ①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다”, ② ‘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속국·식민지이고,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고 주장했다고 기술하고, ③ “『일본서기』를 사실로 믿고,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공소외 1의 책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의 기술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다.
한편, 피고인은 이 사건 책에서 위와 같은 허위사실을 근거로 공소외 1이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면서 친일·식민사학자로 비난하며, 공소외 1의 소행을 구한말의 이완용 일파의 매국 행위에 비유하는 것은 지나친 비유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피고인은 비방할 목적으로 출판물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공소외 1의 명예를 훼손하였다.
3. 판단
가. 이 사건 공소사실 중 ① 부분(“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다”), ③ 부분(“『일본서기』를 사실로 믿고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다”)에 관한 판단
먼저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다”(공소사실 ① 부분)라고 주장한 것으로 기술하였다는 부분과 “『일본서기』를 사실로 믿고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다”(공소사실 중 ③ 부분)라고 주장한 것으로 기술하였다는 부분을 합쳐서 같이 살펴본다.
(1) 이 사건 책에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는 공소외 1”(제337면), “공소외 1은 (중략) 최근 『○○○○○○○ ○○○○』(2010)라는 책에서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쓴 인물이다“(제338면), “공소외 1은 첫째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의 신봉자인 공소외 2 야스카즈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다”(제339면), “공소외 1이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백제를 일본의 속국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아마 일본에도 공소외 1만큼 『일본서기』 기사를 철저하게 사실로 받아들이는 학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제350, 351면), “『일본서기』는 ... (중략) ... 사서인데, 그런 사서를 공소외 1은 사실로 모두 받아들이면서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제351면)와 같은 기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사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도 존재한다.
○ “공소외 1은 이 책에서 3단 논법을 쓴다. 「① 한반도 남부에는 실제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② 그런데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다.」 바로 이 ②번에서 독자들은 헷갈리게 되어 있다. 「탁순에 집결하여 가야 7국을 평정하는 군대의 책임자는 신라를 치러 왔다는 야마토 정권의 아라타와케·가가와케가 아니라 증원군이라는 형태를 띠고 등장한 백제장군 목라근자였다고 생각한다.」공소외 1은 이런 대목에는 고딕으로 표시했다. 가야 7국을 평정한 장수가 백제장군 목라근자라면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소외 1은 임나를 실제로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 아니라 백제라는 안전판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임나가 실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임나를 지배한 것이 백제라는 사실을 밝혀낸 역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중략) 그런데 여기서 세 번째 논법이 등장한다. 「③ 백제를 지배한 것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다.」“ (이 사건 책 제338-340면)
○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직접 지배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일본 우익들에게는 공소외 2의 설이 정설이다. 그런데 공소외 1은 임나를 지배한 것은 백제였다는 안전판을 마련한 채 지금의 전라남도 전역과 경상도 서부 및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부까지 가야(임나)의 강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소외 1은 이 책 곳곳에 백제의 지배를 강조해서 자신이 마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이 사건 책 제340면)
○ “임나일본부를 지배한 것은 백제인데,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 공소외 1은 야마토 정권과 신라·고구려·백제의 관계를 중시한다. 만약 백제가 야마토 조정의 상국이라면 공소외 1의 논리는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공소외 1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사건 책 제340, 341면)
○ “일본학자는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통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공소외 2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공소외 1은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이 사건 책 제344면)
(3)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서 기술한 내용의 전체적인 취지가 위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지에 관하여 살펴보건대, 앞서 본 (2)항과 같은 기술 부분 및 아래와 같은 사정과 논거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의 글의 취지는, 단순히 ‘공소외 1은 공소외 2가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고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설의 내용 전부가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공소외 1은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 중 임나의 지배주체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라는 부분 및 이와 관련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 임나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백제였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서기』의 내용 중 지배주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였다‘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서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다”, “『일본서기』를 사실로 믿고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고 기술하였다는 부분은, 이 사건 책 중 피고인이 다소 단정적으로 기술한 일부 표현에만 국한하여 글을 해석한 결과 제기된 공소사실로 보이는바, 앞서 본 바와 같은 피고인의 글의 전체적인 취지에 비추어 보면, 위 (1)항과 같은 기재내용만으로 위 공소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 어떤 글의 취지를 파악할 때에는 글의 특정한 부분에 사용된 문구나 문장만을 따로 떼어내어 그 부분의 의미에만 매몰되어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 문구나 문장을 전후하여 전개된 논리의 흐름과 그 전반적인 맥락, 저자의 집필의도 등을 종합하여 글의 전체적인 취지를 이해하려고 하여야 한다.
○ 피고인은 위 (2)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 (1)항과 같은 기재를 전후하여 ‘공소외 1이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 및 『일본서기』의 내용 중 임나의 지배주체가 야마토 정권이라는 부분을 부정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기술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위 글을 읽은 독자로서는 위 (1)항에 기재된 일부 문장이나 표현에 근거하여 ‘공소외 1이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서기』의 내용 전체를 그대로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고 인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사건 책에 “공소외 1은 (중략)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쓴 인물이다“와 같은 기술이 존재하나, 여기에 사용된 ‘임나일본부’의 의미를 ‘야마토 정권이 임나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통치기구’라고 해석할 경우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지배했다”라는 피고인 자신의 기술과도 서로 모순되는 점, 이 사건 책의 다른 부분에는 “공소외 1은 임나를 실제로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 아니라 백제”, “공소외 1은 (중략) 임나가 실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임나를 지배한 것이 백제라는 사실을 밝혀낸 역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공소외 1은 임나를 지배한 것은 백제였다는 안전판을 마련한 채”와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앞서 본 기술에서의 ‘임나일본부’는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설치한 통치기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의 전라남도 전역과 경상도 서부 및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국가 또는 지방정부와 유사한 정치적 실체로 존재하였다고 주장되는 임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앞서 본 기술만을 근거로 피고인이 ’공소외 1이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을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4) 다음으로, 앞서 본 해석대로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서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에서 공소외 2의 임나일본부설 및 『일본서기』의 내용 중 임나의 지배주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비판하지 않았고 이를 사실로 인정하였다’고 기술한 것이 허위사실인지 여부에 관하여 보건대, 아래의 사정들을 종합하면, 이는 대체적으로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볼 수 없다.
○ 공소외 2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① 임나의 위치(한반도 남부), ② 임나의 존속기간(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③임나의 지배대상(가야), ④ 역사적 근거(『일본서기』), ⑤ 임나의 지배주체(야마토 정권)’로 요약될 수 있는데,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위 5가지 핵심요소 중 지배주체 부분만을 부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전체적으로 공소외 2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 특히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가야7국(비자벌, 남가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야)의 지명에 관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명 비정은 공소외 2의 설을 따랐다”(공소외 1의 책 제43면 각주7)고 하였고, 임나의 지배영역을 표시함에 있어서도 별도의 인용 표시 없이 공소외 2의 학설에 따른 지도를 여러 차례에 걸쳐 그대로 실었는데(공소외 1의 책 제17, 27, 49, 66, 79, 99, 103, 139, 160면), 그 지도에 표시된 임나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지도상의 가야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임나의 위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열도 등 다른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설들(일본열도설 등)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 공소외 1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임나의 위치와 지배영역에 관하여 공소외 2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고 이를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아래 (나)의 (3), (4)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진원 사건 등 『일본서기』 중 백제와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별다른 비판적 검토 없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서술하였다.
(5) 가사 위 (1)항에 기재된 문구들을 근거로,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서 ‘공소외 1은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라면서 아먀토 정권이 임나일본부와 같은 통치기구를 통해 임나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하였다’고 기술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공소외 1의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술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의 위와 같은 기술은 ‘공소외 1은 표면적으로 목라근자와 그 아들 목만치 및 그 후손 등 목씨 일가를 통한 지배라는 외양을 빌어 마치 백제가 임나를 지배한 것처럼 기술하였으나, 목만치와 그 후손이 나중에 일본인이 되고 야마토 정권의 실권까지 장악한 호족이 되었다고 기술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실질적으로는 목씨 일가에 의한 지배는 백제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일본 또는 일본인에 의한 지배인 것처럼 보이도록 기술한 것이다’라는 취지로 공소외 1의 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 또는 평가를 밝힌 것이라고 보인다.
○ “목만치가 도일한 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전혀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서는 목만치가 도일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소가씨의 조상으로서 목만치와 이름이 일치하는 소가만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공소외 1의 책 제110면).
○ “목만치가 도일하여 왜인이 되었음을 잘 말해준다.”(공소외 1의 책 제120면).
○ “도일 후 목만치라는 이름이 ‘『일본서기』’ 등 일본 측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이름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공소외 1의 책 제120면).
○ “그 후 백제의 임나경영은 주로 목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475년 (중략) 도일하였다가 ‘소가’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바로 100여 년간 야마토 정권의 실권을 장악했던 소가씨의 조상 소가만지이다.”(공소외 1의 책 제197면).
○ “소가씨는 (중략) 야마토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호족이다. 소가씨는 자연히 야마토 정권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고 (중략) 세 명의 외손을 천황으로 앉히고 그 가운데 스순천황을 살해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공소외 1의 책 제111면).
○ “그 이전에 임나를 경영하던 인물은 목라근자와 목만치 부자이고 그 뒤를 이어 임나를 경영하던 인물도 목군 유비기, 목군 윤귀 등으로 모두 목씨 일족이었다.” (공소외 1의 책 제92면)
○ “백제의 가야경영은 목라근자, 목만치, 목군 유비기, 목군 윤귀 등 거의 목씨 일족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앞서 밝힌 바 있다.” (공소외 1의 책 제95, 96면).
나. 이 사건 공소사실 ② 부분(“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속국·식민지이고,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에 관한 판단
다음으로 피고인이 이 사건 책에서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에서 “백제는 야마토 정권의 속국·식민지이고,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고 주장하였다‘고 기술한 부분이 사실의 적시인지 의견의 표명인지에 관하여 본다.
(1) 이 사건 책에 “임나일본부를 지배한 것은 백제인데, 그 백제를 지배한 것은 야마토정권이라는 것이다”(제340, 341면), “공소외 1은 백제를 야마토 조정의 속국이라고 주장한다. 야마토 조정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것이다”(제345면), “『일본서기』를 공소외 1은 사실로 모두 받아들이면서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제351면) 등의 기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 또한 공소외 1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기술도 존재한다.
○ “따라서 공소외 2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토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공소외 1의 책 제133면)
○ “당시 두 나라의 관계를 보면, 백제는 야마토 정권에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 군원을 제공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당시 야마토 정권과 백제와의 관계는 넓은 의미에서 용병관계였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공소외 1의 책 제144면)
○ “당시 야마토 정권이 백제에 제공한 군사의 규모가 500명에서 1,000명을 넘지 않았다면, 그 규모 면에서도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서 주체적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는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런 면에서도 야마토 정권이 백제에 보낸 군대는 소위 한반도 남부경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군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공소외 1의 책 제147, 148면)
○ “‘『일본서기』’ 544년 기록에서 (중략) ...라는 내용을 보더라도 야마토정권이 보낸 군대가 백제를 지원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공소외 1의 책 제148면)
○ “고구려의 주 타겟은 신라보다는 백제였다. 따라서 백제로서는 대고구려전에서 신라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남방 가야지역에서 신라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었다. (중략) 당시 백제는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지원받은 군사를 임나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휘관으로는 왜계 백제관료 등을 배치하고 있었다. 신라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중략)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신라와의 접경인 임나지역에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제공받은 군대나 왜계 지휘관을 배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소외 1의 책 제149-151면)
(3) 그러나 다른 한편, 공소외 1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도 함께 존재한다.
○ “『일본서기』에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의사도 대부분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씌어 있다고 말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중략) 2) 543년 11월, 쯔모리노무라지를 보내 백제에 명령하여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 성주를 일본부에 귀속하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여 ”그대는 누차 표를 올려 마땅히 임나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 지 10여년이 되었다. 말은 그렇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임나는 그대 나라의 동량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짐이 생각하는 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빨리 세우라. (킴메이천황 4년 11월조). (중략) 4) 544년 11월. 일본의 키비노오미,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 구취유리, 가야상수위 고전해·졸마군·사이기군·산반해군의 아들, 다라이수위 허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백제에 갔다. 이에 백제의 성명왕이 조서를 대략 보이고, “나는 나솔미마사·나솔코렌·나솔요가따 등을 보내 일본에 가게 하였다. 천황께서 조칙으로 ‘빨리 임나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또 쯔모리노무라지가 칙언을 받들고 임나를 세웠는가를 물었다. 고로 모두를 부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임나를 세울 수가 있을까. 각각 계책을 말하라”고 하였다(킴메이천황 5년 11월조)」 위 내용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하여 야마토 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공소외 1의 책 제133-136면)
○ “먼저 양국 왕실간의 교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국가간 교류에 있어서도 왕권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지왕(재위 405∼19)이 그 누이동생 신제도원을 일본에 보낸 뒤 백제에서는 적계여랑, 지진원 등 왕녀들을 잇달아 일본에 보냈다. 천황이 지진원을 취하려 했는데 이시까와노따떼와 관계를 맺었으므로 화형에 처하였다.” (공소외 1의 책 제186면)
○ “지진원사건(곧 왜의 ‘천황’이 백제의 왕녀를 불로 태워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백제에서는 왕녀 대신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필두로 의다랑, 마나군, 사아군 등 남자 왕족들을 보내기 시작한다. 특히 곤지는 477년경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다섯 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둘째 동성왕과 무령왕이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 (공소외 1의 책 제187면)
○ “야마토정권은 직지가 일본에서 귀국하기에 앞서 그를 일본 여인과 혼인을 맺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동성왕이나 무령왕의 부인도 일본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일본이 백제의 왕자들을 정책적으로 혼인시켜서 돌려보냈다면 그 상대는 (천)황가의 여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왕가에도 일본 천황가의 피가 수혈되기 시작한 셈이다.” (공소외 1의 책 제187면-188면)
(4) 살피건대 공소외 1의 책에 담긴 위와 같은 상반된 기술과 아래의 사정 및 논거들을 종합하여 보면, (1)항과 같은 피고인의 기술은 ‘공소외 1은 표면적, 총론적인 측면에서는 야마토 정권과 백제가 용병관계 등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였으나, 실질적, 각론적인 측면에서는 마치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식민지나 속국인 것과 같이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생각이 들도록 만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이는 공소외 1의 책에 숨겨진 이면의 논리에 대한 피고인의 가치판단과 평가를 내용으로 하는 의견표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피고인의 위와 같은 기술이 허위사실의 적시임을 전제로 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으므로, 이 점을 지적하는 피고인의 주장도 타당하다.
○ 명예훼손죄에 있어서의 '사실의 적시'란 가치판단이나 평가를 내용으로 하는 의견표현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구체적인 과거 또는 현재의 사실관계에 관한 보고 내지 진술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표현내용이 증거에 의한 입증이 가능한 것을 말하고 판단할 진술이 사실인가 또는 의견인가를 구별함에 있어서는 언어의 통상적 의미와 용법, 입증가능성, 문제된 말이 사용된 문맥, 그 표현이 행하여진 사회적 상황 등 전체적 정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98. 3. 24. 선고 97도2956 판결 등 참조).
○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공소외 1의 책 중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다음 이를 근거로 이에 대하여 자신이 내린 해석 또는 평가를 이어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피고인이 인용한 공소외 1의 주장을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해석할지 여부를 스스로 고민하여 판단할 것이고 이를 단순한 사실의 적시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① 피고인은 공소외 1의 책 중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회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 있다.”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다음 “공소외 1은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백제 및 임나를 본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고구려에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고구려는 사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야마토 정권이 신라·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이란 뜻이다.”라고 논의를 이어갔다(이 사건 책 제342면).
② 또한 피고인은 공소외 1의 책 중 “한편 백제와의 교류를 살펴보면, 왕복 39회에 걸쳐 사자를 교환하고 있는데 야마토 정권은 15회에 걸쳐 백제에 사자를 파견하거나 군사 원조를 제공한 반면 백제는 24회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선진 문물을 제공하거나 사자를 파견하고 있다. 중국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야마토 정권과 백제의 관계는 임나나 고구려·신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긴밀했다고 볼 수 있다.”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후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 15회에 걸쳐서 사신을 보냈는데, 백제는 무려 24회에 걸쳐서 사신을 보냈다고 쓰고 있다. 물론 유일한 근거는 『일본서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왜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도 자주 조공을 바친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속국이라는 이야기다.”라는 기술을 덧붙였다(이 사건 책 제342, 343면).
③ 피고인은 피고인의 책 중 “야마토 정권은 전후 5회에 걸쳐 한반도에 원군 내지는 인부들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전부 백제를 위해 파견했다는 것이다. …… 537년 신라의 임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도 최종적으로는 백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때 오토모노 나나무리 오무라지의 명으로 백제에 파견되었던 일라는 46년간이나 백제에서 관료로 근무하다가 586년에야 귀국했다(비다쓰천황 12년 시세조).”라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고 나서 “공소외 1은 백제를 야마토 조정의 속국이라고 주장한다. 야마토 조정이 백제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근거는 『일본서기』 뿐이다.”라고 자신의 주장을 기술한 후 다시 공소외 1의 책 중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 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것은 군사 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라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 사건 책 제344, 345면)
○ 피고인은 이 사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일관하여 ‘공소외 1의 책에는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다른 속뜻이 숨겨져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이처럼 책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 또는 저자의 숨은 의도는 책을 읽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 쉽게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① “공소외 1은 임나를 실제로 지배한 것은 야마토 정권이 아니라 백제라는 안전판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임나가 실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임나를 지배한 것이 백제라는 사실을 밝혀낸 역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교묘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 식민사학자들의 현란한 말에 속지 말고 항상 ‘결론은?’이라고 물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이 사건 책 제339면)
② “식민사학자들은 일종의 가림막을 쳐서 자기방어를 할 줄 안다. 공소외 1 역시 이것만 이야기하면 물의를 빚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사건 책 제343면)
③ “필자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삼다보면 겉으로 표방한 제목의 속내를 간파하는 데 익숙해진다. 용어 선택이야말로 한 학자의 세계관이 가장 정확하게 드러나는 문제다.” (이 사건 책 제349면)
④ “용어는 그 사람의 속내를 잘 표현하는 법이다. 공소외 3은 베테랑 수사관처럼 공소외 1 같은 범인이 감추고 싶어 하는 증거를, 그 속내까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이 사건 책 제350면)
○ 위 (다)항에서 본 바와 같이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표면적으로는 당시 백제와 야마토 정권이 용병관계와 같은 대등한 관계였던 것처럼 기술하면서도 ‘야마토 정권이 임나의 지배에 관하여 백제에게 명령을 하였고, 백제의 왕이 이 명령을 수행하였다’, ‘백제가 일본 천황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직지왕의 누이동생 신제도원을 시작으로 지진원 등 왕녀들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왕녀 중 지진원이 부정한 행동을 하자, 일본의 천황이 지진원을 화형에 처하였다’, ‘위와 같은 지진원 사건 이후 백제는 왕녀 대신 남자 왕족들을 보내기 시작하였고, 그 중 일부는 야마토 정권에 의해 정책적으로 일본여자와 혼인을 맺어 일본에서 자식을 낳았고 그 중 일부가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는 취지의 기술들을 하였다. 위 기술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만을 근거로 한 것인데, 공소외 1은 자신의 책에서 위 해당 부분을 언급하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나 제3국의 사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내용에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내용을 전혀 부기하지 않은 채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고 기재하거나 마치 위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기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고대국가 사이에서 한 국가가 상대방 국가의 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하거나 상대방 국가의 왕을 섬기기 위해 왕족들을 파견하고 그들이 부정한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의를 하거나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왕족들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역사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의구심이 생길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일본의 역사사회학자인 공소외 5도 원심법정에서 ’『일본서기』는 국가와 천황의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이데올로기를 산출하기 위해 편찬된 사서이고, 현재 연구자들 중 『일본서기』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는 연구자는 없다‘고 진술하였고, 검찰측 증인인 사학과 교수 공소외 6도 당심법정에서 ‘『일본서기』는 굉장히 왜곡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서 그대로 이용하기는 도저히 무리인 책이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그렇다면 공소외 1이 표면적인 주장과는 달리 이와 같이 신빙성에 의문이 많은 사서인 『일본서기』의 내용에만 의존하여 위와 같은 기술을 한 것을 이유로, 피고인이 ’공소외 1이 백제를 야마토 정권의 속국 내지 식민지인 것처럼 기술하였다‘고 주장한 것이 단순한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 피고인에게 비방할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
다음으로 피고인에게 공소외 1을 비방할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1) 관련 법리
형법 제309조 제1항 및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61조 제1항 소정의 ‘사람을 비방할 목적’이란 가해의 의사 내지 목적을 요하는 것으로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과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의 방향에 있어 서로 상반되는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므로,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방할 목적은 부인된다고 봄이 상당하다. 그리고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경우’라 함은 적시된 사실이 객관적으로 볼 때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행위자도 주관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그 사실을 적시한 것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공공의 이익이라 함은 널리 국가·사회 기타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 뿐 아니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을 포함한다.
나아가 그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지 여부는 당해 명예훼손적 표현으로 인한 피해자가 공무원 내지 공적 인물과 같은 공인인지 아니면 사인에 불과한지, 그 표현이 객관적으로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춘 공적 관심 사안에 관한 것으로 사회의 여론형성 내지 공개토론에 기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순수한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피해자가 그와 같은 명예훼손적 표현의 위험을 자초한 것인지, 그리고 그 표현에 의하여 훼손되는 명예의 성격과 침해의 정도, 그 표현의 방법과 동기 등의 여러 사정에 비추어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대법원 2005. 10. 14. 선고 2005도5068 판결, 2002. 12. 10. 선고 2001도7095 판결 등 참조).
(2) 판단
다음과 같은 사정 및 논거를 모두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에게 공소외 1 개인을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되지 않고 달리 비방의 목적을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점을 지적하는 피고인의 주장도 타당하다.
○ 피고인은 이 사건 책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의 목적을 밝혔다. 이에 나타난 피고인의 현실인식은 ‘일제 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일제 식민사관이 극복되지 못함에 따라 사회 전체적으로 큰 해악이 초래되었는데,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연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식민사관의 카르텔에 대하여 과감한 비판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피고인의 현실인식이 타당하고 적절한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피고인이 이 사건 책을 저술한 주요한 동기가 주관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자신을 식민사학자라고 고백한 사람은 없다. 이 땅의 역사학자들은 총론으로는 누구나 식민사학을 비판한다. 그러나 진짜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학자가 등장하면 온갖 수간을 써서 매장시키기 바쁜 인물로 재빠르게 변신한다. 물론 이들이 ‘식민사학을 비판했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라고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재야’니 ‘소설가’니 ‘장사꾼’이니 하는 말이 등장한다. 심지어 ‘민족주의자’라는 말까지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러면 이념 위에 학연 있는 카르텔이 즉각 가동된다. 그래서 이 땅에서 식민사관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그 인맥을 비판하려면 상당한 모욕과 시련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 (중략) 그러나 이제는 이런 카르텔을 깰 때가 되었다. 이런 카르텔 때문에 21세기 백주 대낮에 ‘세월호’ 비극이 발생했고 21세기 백주 대낮에 병역 의무를 수행하던 젊은이가 병영에서 맞아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모두 해방 후 청산당했어야 할 친일파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가치전도에서 연유한 사건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 피고인은 실제로 공소외 1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공소외 1과 개인적인 원한관계가 있었다거나 사적으로 이해가 대립되는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입증할 증거도 전혀 없다. 물론 공소외 1이 사학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소위 ‘강단사학’에서 영향력이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고, 피고인은 이와 입장이 다른 소위 ‘재야사학’의 일원인 것으로 보이는 점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이 공소외 1을 비판할 경우 사학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사회적 명성을 제고할 수 있는 등 피고인이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익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앞서 본 바와 같은 피고인의 주요한 저술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사익적 동기는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 공소외 1은 ◇◇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재단 이사 등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책뿐만 아니라 “(서적명 1 생략)”, “(서적명 2 생략)” 등의 대중적인 책도 발간한 바 있다. 특히 공소외 1이 이사를 역임한 바 있는 ☆☆☆☆☆재단은 교육부 산하기관으로서 2008년부터 총 47억 원의 국가예산을 투입하여 진행된 동북아 역사지도 편찬사업 등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관련된 주요한 국책사업들을 수행하고 있는 공적인 단체이다. 이처럼 공소외 1은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관련된 국책사업의 수행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대중적인 역사서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작지 않은 파급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폭넓은 비판과 견제가 허용되어야 하는 공적인 인물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해석을 둘러싸고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 등으로 촉발된 역사학계 및 시민사회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소외 1의 책에서 소재로 사용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해석의 문제나 피고인이 주장하는 식민사관의 극복의 문제는 사회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춘 공적인 관심 사안으로서 활발한 공개토론 등 폭넓은 논평의 자유가 필요한 사안에 해당한다.
○ 피고인과 공소외 1은 모두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고 이 사건 책과 그 비판대상인 공소외 1의 책 또한 모두 학술적인 성격을 가진 대중적 서적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은 아무런 근거 없이 공소외 1을 음해한 것이 아니라 공소외 1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 책의 함의에 대한 자신의 평가와 의견을 밝힌 것이다. 피고인의 그와 같은 평가가 정당한지 여부는 독자들이 스스로 공소외 1의 책과의 비교, 검증을 통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고, 공소외 1 또한 학술활동이나 언론기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진의가 피고인의 주장과 다르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소외 1은 원심법정에서 ‘이 사건 책이 출간된 후 피고인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안받았으나, 초등학생과 같은 수준의 피고인과는 공개토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등 반박과 토론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학자들 사이에 학문적 토론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그러한 사전적 절차 없이 곧바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 피고인은 이 사건 서적에서 공소외 1에 대하여 “일본 유학만 갔다 오면 친일을 넘어서 매국까지 나아가는 신기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공소외 1을 구한말의 이완용 일파의 매국 행위에 비유한 공소외 3의 비평은 지나친 비유가 아니다”, “살아있는 친일파 공소외 1”, “공소외 1 같은 매국·매사 인물이 같은 대학 내에서, 대 선배 교수를 상대로 ‘이론이 다른 학자 죽이기’를 자행” 등의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표현은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이 공소외 1의 책에 내포된 함의 및 공소외 1이 자신의 책이나 평소 학술활동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 보여준 학문적인 경향과 행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것으로서 오로지 공소외 1 개인의 사생활을 비난하거나 그의 인격을 매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에 ‘비방의 목적’이라는 추가적인 구성요건이 존재하는 것은, 출판물이라는 매체의 파급력을 고려하여 법정형을 일반적인 명예훼손죄보다 높이는 대신, 학문과 사상 및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출판물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경우에는 비방의 목적이 있는 때에만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출판물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폭넓게 보장하고 자유로운 의견의 개진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박, 비판, 상호토론을 통해 원활한 여론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고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 사료된다. 또한 국가권력 특히 사법권이 신중한 고려 없이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비판과 논쟁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그 중 어느 일방을 무분별하게 형사처벌할 경우, 비판적 소수자들의 적극적 문제제기를 위축시키고 주류의 지배적인 논리만을 보호함으로써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학문과 사상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 대한 국가형벌권의 행사는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에서의 비방의 목적 또한 최대한 제한적으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라. 증거채택과 관련된 법리오해 주장에 대한 판단
형사소송법 제291조 제1항은 “소송관계인이 증거로 제출한 서류나 물건 또는 제272조, 제273조의 규정에 의하여 작성 또는 송부된 서류는 검사, 변호인 또는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개별적으로 지시설명하여 조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292조 제1항은 “검사, 피고인 또는 변호인의 신청에 따라 증거서류를 조사하는 때에는 신청인이 이를 낭독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같은 법 제293조는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각 증거조사의결과에 대한 의견을 묻고 권리를 보호함에 필요한 증거조사를 신청할 수 있음을 고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318조 제1항은 “검사와 피고인이 증거로 할 수 있음을 동의한 서류 또는 물건은 진정한 것으로 인정한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검사가 원심재판의 변론종결 후 선고를 하루 앞둔 2016. 2. 4. 공소외 1의 저서 중 “(서적명 3 생략)”, “(서적명 4 생략)”를 참고자료로 제출한 사실, 원심 재판장이 선고 당일 법정에 출석한 피고인의 변호인 공소외 4에게 검찰의 위 참고자료와 관련하여 방어권 보장을 위하여 더 할 것이 있는지 묻자, 위 변호인이 ‘없다’고 진술한 사실, 원심은 판결문에서 위 참고자료를 ‘증거의 요지’ 부분에 거시하지 않은 채 ‘허위의 점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 부분에서 위 참고자료의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 인정사실에 나타난 다음의 사정, 즉 위 참고자료가 제출된 시점이 선고를 불과 하루 앞둔 시점에 제출되어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이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기 어려웠던 점, 증거로 함에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는 공판기일의 증거조사단계에서 하여야 하는데, 원심에서는 선고에 앞서 변론을 재개한 후 증거조사절차에서 증거동의를 받거나 앞서 본 형사소송법 소정의 적법한 증거 채택 및 조사절차를 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참고자료의 내용이 '허위사실의 인식'이라는 범죄구성요건을 인정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된 점 등을 종합하면, 원심판결에는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증거법칙을 위반한 잘못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위 증거들은 당심에서 정식으로 피고인의 동의를 통해 그대로 증거로 채택되었으므로, 당심에서 위와 같은 사정을 파기사유로 삼지는 않는다.
4. 결론
그렇다면 피고인의 항소는 이유 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64조 제6항에 따라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변론을 거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제2항 기재와 같은데,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고, 형법 제58조 제2항 본문에 따라 판결의 요지를 공시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지영난 판사 손원락 판사 이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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